[영화] 자객 섭은낭 (刺客聶隱娘The Assassin, 2015)

업데이트 된 리뷰 -- http://hyvaamatkaa.tistory.com/204


시카고 영화제에서 놓친 영화가 꽤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자객 섭은낭이었다. 놓쳤다기 보다는 그냥 관람을 포기했다. 상영시간은 단 두 타임에,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갈라 프레젠테이션으로 나오는 영화표를 내가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지아장커 영화도 매진으로 결국 못 봤으니...


불행 중 다행으로, 자객섭은낭이 미국 전역에 개봉하였다. 대규모 개봉은 아니고 몇몇 도시들 극장들 위주로 하는 개봉인데, 이곳에서는 약 1~2주만 스크리닝한다고 했다. 그래서 할로윈날 할로윈 파티는 안 가고 영화관에 냉큼 다녀왔더란다. 




<자객섭은낭 刺客聶隱娘> 

대만 2015

허우샤오시엔 候孝賢  

출연: 서기, 장진, 사흔영, 츠마부키 사토시 등



1. 


이 영화는 시네마토그래피 하나만으로도 영화관 가서 볼 것을 강추할 만하다. 영화 공부하는 분들과 같이 갔는데, 다들 영화 끝나고 제일 처음 한 말이 영상감독 누구냐는 질문이었다. 필름 영화에서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영상미에 대한 각종 실험으로부터 얻은 노련함을 집약해둔, 황홀한 영화였다. 일단은 당나라가 배경이고, 고증이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국에서 조금 욕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증이 뭐 대수일까, 필름 카메라로 저렇게까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예전에 타셈 싱 감독의 <더 폴>을 보았을 때 발로 뛰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영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탄복한 적이 있다. 허우샤오시엔은 이를 훨씬 넘어섰다. 발로 뛰고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을 온갖 감각으로 마주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철학과 노련함으로 담아내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느낌이다. 더 폴이 예쁜 사진들을 잔뜩 모아서 황홀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면, 자객 섭은낭은 이 세계를 정말 장엄하면서도 섬세한 수묵화로 담아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렸다는 표현보다는 담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것은 감독과 제작진의 집념이 없이는 이뤄낼 수 없는 산물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허우샤오시엔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납득이 갔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100%, 아니 120%로 담아내는 능력이 부럽다. 


(대신에 영상미가 강조되어 영화 속 식생이 좀 장난 아니라는 것이 함정... 냉대~온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부터 남쪽 열대지방에서 날 것 같은 나무들까지 막 다 나온다....참 넓은 동네에 사는구나 너희들... 어라 그러고보니 무협영화의 단골 대나무가 안 나왔네?!)



포스터의 수묵화도 멋지지만 영화는 더 멋있습니다 여러분. 역사와 전통의 수묵화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영화로 배운 기분입니다...




2. 

사운드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중간에 배우가 악기 뜯는 장면은 매우 거슬렸지만 그것은 내가 소싯적 국악동아리에 몸담았기 때문에 예민해서 그런 것이고... (실제로 우리 동아리 친구들은 영화관에 가서 사극 영화를 보면 악기에 매우 집중한다. 예컨대 미인도를 보는데 배우의 가야금 연주 때문에 다들 확 깼다며 투덜투덜 했음...)  

각종 바람 소리, 새소리, 옷자락이 사부작거리는 소리, 발걸음 등등 여러 소리들이 한없이 증폭되어있었다. 소리의 증폭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매우 조용했고, 관객의 입장에서도 나의 소리가 때로 매우 신경쓰였다. 소리를 증폭시킴으로써 소리가 없는 것, 혹은 조용한 것에 대한 감각 또한 증폭시킨 셈이다. 조금 이상한 비교일 순 있겠지만,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은 생물체 아리에티가 느끼는 시끄럽고 거대한 세상을 통해 고요함을 소리로 채웠다면, 허우샤오시엔은 소리를 고요함으로 채운 것이다. 즉, 관객들로 하여금 고요함에 대한 감각을 인지하게끔, 또한 날카롭게끔 만든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객'의 이야기이니 이만큼 적절할 수가 없다. 


덧붙여 이는 (어떻게 보면 허우샤오시엔이 공언한) 무협영화라는 장르기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무협영화에서는 칼이 부딪히는 소리, 기합 소리, 맞는 소리 등등이 매우 강조되곤 한다. 허우샤오시엔은 무협영화에서 일종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면서도, 이러한 영화적 문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익숙한 문법을 새로운 감각을 통해 경험케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는 지침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일단 익숙하니까 보면서 마음이 편하다), 익숙한 것을 달리 생각할 여지도 제공하였다. 나도 언젠가 다른 매체를 통해 응용해보고 싶을 정도로 매우 놀라운 전략이다. 


배경 음악의 사용도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때로는 매우 낯선 음색들,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음색들이 연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절하다고 느꼈다. 언젠가는 음악 사용에 집중해서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을 만큼 말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볼법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어머 미쳤어




[이하 스포일러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의미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3. 

영화에서 등장하는 액션 씬들은 이 영화가 분명히 무협영화임을 나타내준다. 그렇지만 무협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실적이다. 자객 섭은낭은 조용히, 우아하게, 그리고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상대를 제압한다. 장풍을 쏘거나, 허공답보를 하며 날아다니거나, 말도 안되는 괴력을 과시하거나, 검 끝에 서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갈고 닦은 현실 속 절정고수라면 저렇게 할 것 같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의 규칙을 따른 이펙트 사운드 덕분인지, 혹은 섭은낭이라는 말수 적고 자객다운 캐릭터 덕분인지는 몰라도 무협영화의 냄새가 짙게 나며, 기존의 무협 영화들을 비웃지도 않는다. 다른 것들을 비판함으로서 리얼리즘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간다고 느낀 부분이 아마 이런 점들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액션 씬들의 호흡이 다소 짧다는 것이다. 기존의 무협 영화는 액션씬을 매우 강조하여 보는 이를 즐겁게 하지만, 이 영화는 그 호흡을 짧게 함으로써 오히려 액션 씬들을 부각시킨다. 대체로 매우 고요요하다가도, 화면이 전화되며 날카롭게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등장할 때마다 흠칫 놀랐다. 액션 씬들도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진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정중동(靜中動)과 같은 배치 덕분일 것이다.


누군가는 영화가 느리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엔 '느리다'기 보다는 다른 시간성(temporality)을 강조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무협 액션이 탄생할 때까지의 빚어져야 할 관계성과 자객의 그림자 같은 존재를 부각시킨 것일 뿐이라고. (사족: 실제로 일본의 자객과 같은 닌자忍者는 인내하는 자다...그나저나 일본판 제목은 검은 옷을 입은 검은옷의 자객...黑衣の刺客) (사족2: 그런 의미에서 스토리는 참 느슨한데 인물 간의 관계는 참 복잡하게 얽혀있다...)




4.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다소 파편적인 스타일을 가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혀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마도 선택과 집중을 매우 잘했다는 것의 방증이지 않을까. 사람마다 느끼는 점이 다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객'이라는 캐릭터에 영화의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섭은낭이 자객을 수행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영화 속 모든 것을 조용히(영화가 조용해서 나도 반드시 조용히 봐야한다) 지켜보는 내가 자객이 된 것처럼, 영화의 화면과 그 너머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어내는 그런 영화다. 


이 영화는 아무리 고요하지만 모든 화면이 새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바람 소리와 같은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바람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비단 소리 뿐만이 아니라 차양막이나 비단, 촛불, 나무, 풀잎, 구름 등 시각적인 매체들도 총동원 하였다. (특히 티엔지안田季安이 방에 있을 때 섭은낭이 시야에 들어오는 장면은 정말 이전에는 본적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장면이다. 매우 충격 받았다.) 이러한 감각의 확장 덕분일까, 관객은 스크린에 비쳐진 풍경 이상의 넓이와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내가 써놓고도 나중에 읽으면 무슨 미친 소리야 할 만한 문장이긴 한데, 정말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앞서 말한 <더 폴>이 아기자기한 프레임 속의 판타지 세계를 상상케 했다면, 자객 섭은낭은 프레임은 그저 눈길이 가는 곳일 뿐, 마치 내가 그 속에 빨려들어가 영화 속 세상의 일부가 된듯한 느낌을 준다. 스케일과 화려함으로 압도하기 보다는, 그 우아함에 압도되는 느낌? 



5.

이 영화를 보고나서 왕가위의 <일대종사 一代宗師, 2013> 생각을 간간히 했더란다. 둘다 무협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느낌인데, 그 지평이라는 것이 사뭇 다른 듯 하다. 일대종사의 화려함과 다소 난잡한 스토리(반드시 엽문 이야기를 알아야만 이해가 갈 정도로...)는 기존 무협영화를 정면 돌파하여 새로운 길을 만드는 느낌이었다. 슬로우 모션의 활용, 거대한 눈밭의 붉은 꽃과 같은 영상들은 무척 세련되었고 신선한 느낌이었다. 없는 것도 만들어낼 것 같은 영화 감독의 패기가 느껴졌다고 해야하나. 반면 허우샤오시엔의 자객섭은낭은 기존 무협영화를 품어내며 새로운 지평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느낌에 가깝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한껏 담아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암만 눈씻고 봐도 중국 건축양식이 아닌 것 같은 건물들이 등장하고, 실제로 촬영도 대만, 중국, 일본(교토)을 오가며 촬영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를 제대로 재현 못했다고 욕 먹는거지만, 세트가 아닌 세계를 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뭐 상관없다. 재현 못하면 어때, 어차피 당나라 소설인데. 

요컨대 왕가위 영화만큼의 충격적인 느낌보다는 조용히 압도당하는 느낌이랄까. 일대종사를 보고나니 다른 무협영화에 대한 실망감이 들었다면, 자객섭은낭을 보고나니 다른 (분위기 있는) 무협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물론 일대종사를 본지 2년이자 지났기 때문에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언제 한 번 연속으로 보고 비교를 해보는 것으로...



6. 

나는 허우샤오시엔 영화가 그간 무협영화에 대한 훌륭한 변이라고 생각했다. 무협영화라는 장르가 모색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을 제시하면서도, 기존 영화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그런 영화들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무협영화의 풍경들은 늘 아름다웠다. 대나무숲, 멋진 기와건물들, 첩첩산중의 안개 등... 하지만 너무나 정형화된 나머지 관객들은 이들을 보면서 신비로운 중원의 이미지를 소비했을 뿐,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을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무협영화는 일단 액션이 멋지잖아....)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무협의 이야기들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을 한껏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 일종의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따라서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날아다니지도 않고, 번개나 비바람을 동원하는 등 자연을 호령하지도 않는다. (사족인데, 자연 속을 거니는 인물들을 보면, 의도적으로 이들을 축소시켜 촬영한듯 했다. 예컨대 갈대라든가 길가의 관목 등의 크기, 그리고 배경의 암벽 등은 그 크기가 극대화 된 반면 인물들은 아주 작아보이는 장면들이 종종 있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영화 자객섭은낭이 무협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말이었다. 영화사적으로 역사적인 순간을 경험한 듯해 내가 다 영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7.

이 영화의 관람을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목적에 따라, 추구하는 지향점에 따라, 익숙한 템포에 따라 영화에 대한 감상이 많이 다를 것 같다. 일대종사보다는 조금 더 접근하기 수월한 영화일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지루해서, 답답해서, (자막 퀄리티에 따라 - 영문 자막은 헬이다 헬) 이해가 안 가서 상영관을 떠나는 사람들도 생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화 관람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습니다...ㅋㅋ 나는 허우샤오시엔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지만, 특히 과거 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추천하고프다. (같이 관람한 분들에 따르면 기존 영화작과의 비교가 제법 쏠쏠하다고 한다.) 덧붙여 혹시 보고 싶다면 꼭 영화관에서 볼 것을 권한다.



덧:

스토리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슬프게도 영어 자막 덕분에 스토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 사극이나 중국 무협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보는 것은 지옥이다.) 심심하면 고문 쓰고 (하지만 고문을 가장 많이 쓴 섭은낭 스승님의 연기는 국어책 읽기 style... 초반에 몰입도 떨어져서 혼났다), 애초에 대사가 적은 영화라 나의 일천한 중국어를 믿을 수가 없어서 자막 열심히 봤는데 혼돈의 무아지경에 빠졌다... 혹시 나처럼 불쌍한 영혼이 있을까봐 인터넷에서 건져온 인물관계도를 첨부합니당...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거 몇 개가 있다...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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