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남기는 습관/게임, 웹툰 (1)
[게임] Shenzhen I/O (선전 I/O)

작년 연말, 연쇄할인마 스팀의 여러 신기한 게임들을 둘러보던 와중 우연히 한 게임이 눈에 띄었다. 

"Shenzhen I/O"라는, "선전 (심천/深圳)"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게임이었다. 이 게임의 정체가 뭐든 무조건 사야만 해! 라는 일념으로 질렀다. 왜냐면 나는 심천을 연구하니까...그리고 난 게임을 좋아하니까... 관심있는 지명이나 지역 정보 등이 컨셉이 되는 게임들은 가급적 모아두려고 하고, 영화들도 꼭 기록을 해두려하는 편이다.

아무튼 그렇게 즐겁게 게임을 지르고 지난 달 어느 주말, 이것은 연구의 일환이라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게임을 시동해보았다.




정말 아무 설명 없이 로딩화면이 지나자마자 이런 화면이 뜬다. 심지어 그 로딩화면 조차도 개발사인 Zachtronics의 화면이 아니라 "概念CS"라는 게임 내 프로그램명이 뜬다... 난 진지하게 중국 쪽에서 개발한 게임인가 생각했다. 

Shenzhen, Huaqiangbei District-CAM 04-LIVE라고 쓰여진 글자는 마치 해당 지역에 CCTV를 라이브로 보여주는 듯한 착각을 준다. 나는 무척 흥분했다. Huaqiangbei (华强北/화창베이)는 실제 심천의 전자기기 메카같은 곳이다. 쉽게 설명하면 용산 같은 곳이지만 용산과는 비교도 안되는 인력과 자본, 상업 네트워크가 집적된 곳이다. (물론 이곳에도 온갖 종류의 호객행위가 넘쳐난다....) 참고로 라이브카메라는 아닌 듯 하다. 비가 오는 것 같은 날씨로 표현되었는데 심천은 쨍한 더운 날이었다... 

게임의 정체를 전혀 알아볼 생각도 안하고 대뜸 받았는데, 알고보니 이 게임은 내가 여태껏 해본 그 어느 게임보다도 진입장벽이 높은 게임이었다...


초반에 접속하면 스크린샷 화면에 나오는 버튼 중 Solitaire을 제외하고 세 가지가 있다. 뭘 해야할지 몰라서 일단 conceptMAIL을 열어보니 "Welcome"을 비롯한 각종 메시지들이 등장한다. 만약 온라인 게임이라면 공지사항이겠거니와 하고 무시하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으니 일단 읽어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글이 많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플레이어는 Shenzhen Longteng Electronics Company LTD. (深圳龙腾科技有限公司, Longteng은 롱텅이라 읽으면 됨)에서 일하게 된 상황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말 앞뒤 설명 다 자르고 바로 회사에서의 웰컴 패키지(...)를 받는 사원의 입장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사원들의 이메일 교신들을 통해 대충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하는 일은 어떠한지, 심천은 어떤 곳인지, 그리고 이 게임이 기초하고 있는 배경은 어떠한지 등을 유추해낼 수 있다. 물론 게임 플레이 그 자체와는 별 관계는 없지만 뭔가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재미는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어 못하는, 취업전선에 밀리고 밀려 심천에 난생 처음 떨어진 외국인 (아마도 백인) 남자 근로자 정도를 상정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게임의 포인트 1: 게임의 메시지함을 통해 플레이어의 상황 및 각종 배경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바로 그 다음 메시지는 Important: Read the Manual!이다. 매뉴얼을 읽어라는 내용인데, 이거 농담이 아니다. 이 게임의 가장 주요 포인트를 요약하자면 RTFM(READ THE F**KING MANUAL) 정도가 된다. 

메시지함을 닫고 두번째 메뉴인 "Datasheet"를 누르면 매뉴얼이 뜬다.... 무려 47페이지짜리 PDF가 뜬다... 처음엔 이게 그냥 게임 플레이 설명하는 가이드나 매뉴얼인 줄 알고 안 읽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 그게 맞긴 한데 그게 아니기도 하다. 뭔 소린고 하니: 


이런 게 튀어나온다. 무슨 말도 안되는 기기부품 매뉴얼 같은 게 나온다. 일단 매뉴얼 보고 크게 멘붕 한 번 하면 된다. 

이 게임의 주인공(=플레이어)는 어셈블리어를 이용해서 간단한 회로를 디자인 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고, 출근 첫날 각종 지시 메일과 웰컴패키지로 디자인 매뉴얼을 받은 것이다. 물론 이런 것까지 파악하는 데에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왜냐면 나는 코딩할 줄도 모르고 어셈블리어니 뭐니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없다.) 

매뉴얼 패키지에는 각종 부품들의 매뉴얼(...)들이 들어있다. 예컨대 위의 캡처화면 오른쪽의 부품은 청샹Micro (诚尚Micro)라는 가상의 회사에서 나온 MC6000이라는 Microcontroller 칩의 매뉴얼인 것이다. 이런식으로 게임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부품들과, 부품들이 사용하는 어셈블리어에 대한 각종 자료들이 여기저기 예제 등과 함께 나와있다. 

이 게임의 포인트 2: 매뉴얼을 통해 (게임 내에서만 통용되는) 어셈블리어의 단어들, 규칙, 문법을 파악하고, 각종 부품들의 기능을 알아본다. 


참고로 이 매뉴얼의 재미있는 점. 진짜 어디 회사에서 무책임하게 줄 것 같은 매뉴얼을 잘 재현해두었다. 그 말은 곧:



가끔 이렇게 자비없이 중국어로만 되어 있는 페이지도 나오고 (중국 회사니까), 혹은 다른 자료를 사진찍어서 끼워넣은 것 같은 자료들도 나온다. ^-^ 참고로 이 게임은 영문 게임이다. 중국어를 읽을 수 없는 것이 퍼즐의 일부가 아닌가 싶다. (난 중국어를 읽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게 뭔 소린지는 모르겠다.) 


매뉴얼에 크게 멘붕하고 다시 메인 메뉴로 돌아오면 다른 "퀘스트"(업무지시) 이메일들이 와있다. 해당 메시지를 열어보면 어떤 회로를 디자인하려고 하는지 내용이 나와있고, 하단의 "Open in Concept CAD"를 열면  버튼을 클릭해보면 이 게임의 핵심인 "개념 CAD" (概念CAD, 중국어로 개념이라는 단어가 컨셉이라는 뜻을 가짐...어라 한국어도 그런가) 프로그램이 뜬다.  

참고로 이건 이미 클리어 된 게임이라 이미 업무 확인 메일이 와있다. 원래 오리지날 퀘스트는 이미테이션 CCTV용 회로를 디자인 하는 것으로, 두 개의 등이 불규칙한 느낌으로 켜지게 하는 게 목적이다. 



역시 클리어한 업무라 각종 도표가 나와있다. 이게 뭔고 하니,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하였을 때 내가 디자인한 회로가 1) 생산 비용; 2) 전력소모; 3) 코드 라인 수에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도표다. 정답이 있는 게임 같지만 꼭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게임은 아닌 셈이다. 이미 디자인한 회로를 부품 추가라든가, 어셈블리어에 익숙해짐에 따라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재디자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화면을 켜면 대충 이렇게 나온다. 나는 이미 퀘스트를 몇 개 클리어해서 부품이 더 언락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Note, Bridge, MC4000만 언락되어 있다.

Note는 그냥 플레이어가 스스로 메모할 때 쓸 수 있는 포스트잇이라고 보면 된다. 

Bridge는 회로를 연결할 때 (기기 내 초록색 부분) 회로가 겹치지 않도록 해주는 말 그대로 '브릿지'다. 첫번 째 퀘스트에서는 쓸 일이 없다. 

MC4000은 예제에서 사용된 가장 기본 칩이다. 이거 하나 쓸 때마다 생산비용이 늘어난다.


예제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mov 0 p0
slp 6
mov 100 p0
slp 6

# why is this
# so hard? :(


앞서 컨셉 메일을 잘 읽어봤다면 알겠지만, 원래 일하던 회로디자이너가 때려치우고 도망가서 플레이어가 고용된 상황이다. 따라서 이 예제는 지난 디자이너가 작업하다 때려치우고 간 결과물(...)

이제 여기서 플레이어가 해야할 일은 예제물과 매뉴얼을 끼고 이 어셈블리어의 규칙을 파악하여 조건에 맞는 제품을 디자인 하는 것이다. 하단의 메뉴에는 Information과 Verification이 있는데, 원하는 디자인을 만든 다음 Verification 버튼을 눌러 제대로 회로가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Verification 화면을 통해 저 예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규칙을 배울 수도 있다. 

이 게임의 포인트 3: 매뉴얼 등을 통해 파악한 어셈블리어와 규칙들을 이용해 조건에 맞는 회로를 디자인한다. 

가급적 타블렛이든 듀얼 모니터든 인쇄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뉴얼을 옆에 같이 끼고 하는 것을 아주 강력히 추천한다. 퀘스트가 늘어날 수록 매뉴얼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디자인이 끝난 회로의 Verification 화면이다. 지시받은 업무의 목적에 맞는 회로를 디자인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일단 위의 예제와 Verification에서 나타나는 패턴, 매뉴얼의 내용을 참고할 때 플레이어가 유추할 수 있는 게 몇 가지가 있다:

1) #를 붙인 건 메모다... 작동 안함.

2) mov는 말 그대로 전기 신호를 옮김을 의미한다. mov 뒤의 숫자는 양을 의미한다. 즉, mov 0의 경우 신호를 운반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mov 100의 경우는 100에 해당하는 신호를 운반함을 의미한다. 

3) mov 숫자 뒤에 따라오는 것은 전기 신호를 어디로 옮기는가를 보여준다. 즉, mov 100 p0은 p0으로 100의 신호를 보낼 것을 의미한다.

4) slp은 sleep을 의미하며, slp 뒤에 따라오는 숫자에 따라 해당 사이클만큼 칩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에 기초해서 두번 째 파츠를 다음과 같이 코딩하면, verification 화면의 패턴을 따라가는 신호를 생성할 수 있다. 

mov 0 p0
slp 4
slp 2
mov 0 p0
slp 1
mov 100 p0
slp 1


여기까지 하고 나니 내가 시방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디자인 verification을 거친 후 다시 concept mail로 돌아가면 업무확인 메시지와 함께 앞서 잠깐 설명했던, 내가 디자인한 회로의 성능/효율 등을 표기한 그래프가 나온다. 


그리고 이건 예제에 불과했다... 갈수록 퀘스트=업무는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네온사인 회로 디자인 하는 퀘스트만 해도 첫 번째 퀘스트에 비해 보다 복잡하다. 


완료하면 업무 확인 메일과 함께 그래프가 나온다. 보다시피 MC4000 부품을 세 개 썼고, 브릿지를 사용했다. 코드는 다음과 같다: 

mov acc p1
not
mov acc p0
slp 1


mov 100 p0
slp 6
mov 0 p0
slp 1
mov 100 p1
slp 2
mov 0 p1
slp 1


slp 6
mov 100 p0
slp 1
mov 0 p0
slp 2
mov 100 p0
slp 1
mov 0 p0


전력효율이 다소 떨어지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코드라인수는 1-2줄 정도 적은 무난한 회로 디자인인 것 같다. 

아직 많이 깬 건 아닌데, 초반에 진짜 이렇게까지 고생한 게임이 없었던 것 같다. 특히 그 주사위 게임용 카운터 회로 디자인할 때에는 공략이 제대로 된 게 없어서 정말 1시간 넘게 씨름했던 것 같다. 코딩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래도 할 만 할 것 같다. 난 기본적으로 이런 "언어"들이니 "문법"이니 하는 것 자체를 전혀 접해본 적이 없어서 집념과, 다른 회로들에 대한 유투버들의 공략들을 참고해가며 끼워맞춰갔다. 

간혹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간결한 코드를 짜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경탄스럽다...

이 게임의 포인트 4: 코드의 이해도 및 부품 증가 등에 따라 회로를 보다 효율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다. 남들의 디자인과 비교해서 내가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보는 것도 꿀잼. 

(세상은 넓고 나는 부족하다는 것을 아주 많이 느낄 수 있게 된다.)


덧붙여 스스로 회로의 목적을 설정하고 코드를 짠 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퀘스트도 있다. 난 하지 않았지만, 컨텐츠를 늘리는 차원에서도, 또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차원에서도 매우 의미있는 퀘스트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목적을 이미 주어준다.) 

이 게임의 포인트 5: 생각보다 열려 있는 게임의 목적성. 


아, 그리고 보너스 퀘스트가 하나 있다. 팀장이라고 해야하나 주임이라고 해야하나, 매니저라고 해야하나. 플레이어에게 지시를 내리는 장지에 (张杰 Zhang Jie)가 딸이 디자인한 게임이라며 솔리테어 게임을 하나 던져준다. 단순한데 일반 솔리테어 보다는 좀 더 어려운 게임이다. 스팀에 이 솔리테어만 따로 풀려있기도 하다. 


이 게임의 보너스: 솔리테어 게임.


그 밖에도 다른 컨텐츠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 일단 여기까지. 


이 게임은 분명 일종의 퍼즐 게임임에는 틀림 없는데, 구성이라든가 컨셉 같은 게 좀 특이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이게 일을 하는 건지 게임을 하는 건지 뭘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 그런 상황이 오는 게임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쯤 해볼만한 게임인 것 같은데 (덕분에 코딩이라는 것을 배울 용기가 생겼다는 게 함정이다), 진입장벽이 정말 상당히 높다. 

1) 분명 47페이지나 되는 매뉴얼이 있는데 막상 켜보면 뭐하는 게임인지 잘 모르겠음.

2) 코딩의 ㅋ자도 모르는 플레이어게는 헬헬헬한 난이도. (=접니다...) 그나마 해외 유투버들의 공략을 보며 따라하다보면 아, 이게 뭔지 알겠다 싶은 느낌이 들기는 함.

3) 영어. (중국어를 잘 해도 영어를 못하면 이 게임은 도저히 플레이 할 수 없다는 게 개그.) 텍스트의 양이 제법 방대하고, 특히 디자인하는 회로의 목적을 설명한 부분을 자세히 읽어봐야 하므로 영어를 못 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마 추천할 수 없는 게임. 매뉴얼 뒤지기도 힘든데 사전까지 뒤지라는 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다. 그래도 기본적인 영어가 된다면, 또한 특히 코딩 좀 하실 줄 아는 분들은 다른 공략들 따라가면서 규칙성 맞춰가면 어떻게든 게임 자체는 플레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게임 프로그램 자체가 매우 가볍고, 플레이 시간도 (유저마다 갭이 엄청 크겠지만) 제법 길다. 나 같은 코딩 멍청이에겐 필연적으로 매우 긴 플레이시간을 보장하는 게임이다... 뭐 특별히 시간제한이 있거나 다른 압력의 요소가 없는 게임인지라 하다보면 괴로운즐거운 마음으로 뇌를 괴롭히며단련시키며 시간을 삭제시킬 수 있다. 


유저 리뷰들도 재밌다... 시간당 120불 받으면서 할 일을 내돈 17불을 주고 하고 있다라든가, 이것은 게임이 아니라 잡시뮬레이터라든가, 디자인하다 빡친다든가... 뭐 뇌를 탓하는 슬픈 리뷰들이 이 게임을 강추하고 있다. 저도 조심스레 이 게임을 추천해봅니다. 



참고로 이 게임의 개발사인 Zachtronics는 예전에도 이런 매우 공대스러운 게임을 만들었다고 하며, 그 후속작이 선전 I/O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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