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8. 05:34, 흔적 남기는 습관/영화
CEAS 필름 도서관에서 이 DVD를 집은 데에는 홍상수표 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보기는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사실 그 동안 강원도의 힘 정도를 제외하고는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본 적이 없고, 그나마도 홍상수 감독 영화인지 모르고 봤다... 그 밖에 한국어에 대한 갈망과, 한국의 풍경을 보고 싶다는 갈망, 다른 DVD 하나가 연구주제와 관련 있는 영화니 최대한 지금 내 삶의 어느 것과도 관계 없는 무언가를 보겠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그래서 우리 선희,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 나쁜 사마리아인 같은 영화들을 집었다 놨다 했다. 결정적으로 우리 선희를 집어든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DVD 뒷면의 작품 소개에, 선희라는 인물이 유학을 가기 위해 추천서를 받는다는 설명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정말 별거 아닌 계기인데, 이토록이나 어디선가 공감을 바라고 있었던 걸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간 홍상수 감독 스타일에 대해 들었던 말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우리 선희는 엄청나게 몰입을 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고, 실제로 감독의 연출 자체가 그런 몰입을 방해하는 느낌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찌질한 일상 속에 관객인 내가 녹아들어가는 느낌이기도 했다. 영화라고 생각하면 거슬리는데 오히려 그런 장치 때문에 내가 더욱 더 이 사람들을 훔쳐본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하나. 인물들의 찌질한 감정들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내가 찌질해진 순간이었다. 물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설정상 나와 나이가 비슷할 선희를 보면서, 그리고 좁은 사회에서 엮여나가는 몇몇의 인물들을 보면서 나의 지난 학부 때의 술먹고 헛소리 하던 기억들과, 여기서의 찌질함과, 지금 여기 미국에 있음으로써 성립되지 않을, 다른 이들은 공유하지만 나는 공유하지 못할 조각들의 형상들이 자꾸 마음 속에서 떠올랐다. 문수(이선균)라는 인물의 섬세한 손연기, 구부정한 선희(정유미)의 목과 어깨 같은 걸 보노라면 나와 주변 사람들의 자그마함과 위축된 몸짓이 떠오르면서도, 비슷한 나이대일 선희에게 결정적인 순간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런 인물이 있단 말이야?
정말 오랜만에 그냥 '한국' 아니라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말을 쓰는, 어딘가 새침할 것만 같은 서울사람들과 좁은 거리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떻게 보면 정말 처음 들었던 것 같다. 서울은 내게 늘 낯선 곳이었고, 평생 살진 못할 곳이었는데, 잠깐 머무르겠다고 다짐한 곳을 그리워하는 법도 있구나.
처음에는 감기기운으로 인한 두통 때문에 조금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계속 보다보니까 좋았다. 음악 사용도 좋았고. 내가 용인할 수 있는 찌질함의 한도 내였고, 그래서 좋았다. 지금 마음 상태로는 이것보다 더 하면 못 볼 것 같아... 소품 같은 영화라고 하긴 어렵지만 뭐 그런 말이 떠오르긴 했다. 노란 밝은 분위기를 내내 유지하는 것이 참 인상깊었다. 좋다. 저건 나도 지향하는 바다.밝은 노랑, 밝은 연두, 밝은 보라, 이런 색깔들로 덧칠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제법 그럴듯하기도 하고 세련되기도 하고 심지어 산뜻하기까지 해서 이걸 찌질함이라 불러야하는가에 대해서도 살짝 고민이 들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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