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건설 (1)
[영화] 서스펜시온 (Suspensión, 2020)

 

서스펜시온 (Suspensión), 2020년 개봉, 콜롬비아. 75분. 스페인어 (영어 자막).

감독: Simón Uribe.

자세한 정보는 배급사인 이카루스 필름의 페이지 참조: http://icarusfilms.com/if-susp

 

영상, 글, 음악 등을 막론하고 창작활동을 하다보면, 활동의 형식과 장르의 특성의 한계에 닿는 순간들이 온다. 어떤 소재나 문제 의식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데에서 과연 내가 채택한 표현방식이 최선일까? 라는 질문이 샘솟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라는 형식으로 인프라를 좇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프라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본디 거대한 시스템과도 같고, 또 특별히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더군다나 긴 시간을 들여 구축하거나 교체한다. 그렇다면 인프라와 그 역사라는, 카메라 화면에 담기에는 복잡하면서도 거대한 대상을 어떻게 주어진 1-2시간의 시간 내에 담을 수 있을까?

 

왕빙(王兵)의 철서구(铁西区, West of the Tracks)라는 영화는 무려 551분의 러닝타임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 인프라가 해체되는 역사를 담아냈다면, 우리베는 조금 다른 접근을 취한다. 우리베는 훌륭한 촬영과 편집, 그리고 정말 눈부신 사운드 편집을 통해 인프라의 부재와 그에 대한 욕망이 재생산되는 환경을 감각적으로 재현한다. 정글의 끈적끈적하면서도 불쾌한 습도, 철골의 물성, 시멘트의 건조함, 그리고 잘 설계된 인프라가 주는 쾌적함에 대한 상상 같은 것이 아주 섬세한 편집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콜롬비아 남부 정글 지역의 고속도로 문제의 역사는 압도적인 자연 환경을 마주한 사람들 간의 위태로우면서도 지리한 일상을 통해 전달된다.

 

서스펜시온은 소위 민족지 영화(ethnographic film)에 해당하는데, 민족지 영화라는 표현이 낯설다면 대충 다큐라고 이해하면 된다. 인류학 연구 재단인 웨너그렌 재단에서 촬영자금을 댔다. 민족지(ethnography) 작성에 있어 가장 특징적이면서도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체화(emboddied)된 지식과 감각의 문제다. 민족지는 대체로 글의 형식으로 많이 작성되는데, 연구자가 어느 순간, 어느 현장에서 느낀 감각들을 어떻게 정제된 글의 형태로 재현할 수 있을까? 또한 문화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체화된 지식이라는 것도 분명히 인간과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일텐데, 이러한 감각이나 체화된 지식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게 가능할까? 이러한 소재나 질문들은 특히 자연과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재현 가능성라는 요소를 만족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늘 쟁점이 되어 왔다.

 

그렇다보니 인류학 내에서도 감각을 다루는 다양한 방법들이 고려되어 왔는데, 특히 민족지 영화는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들을 아주 첨예하게 다뤄왔다. 그리고 서스펜시온은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세련되면서도윤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말하긴 어려운데, 특히 마지막 10여 분의 편집은 정말 감독이 얼마나 첨예하게 고민해왔을까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장르나 소재 특성상 한국에서는 개봉이 요원하긴 한데, 영어 자막 버전은 배급사인 이카루스 필름을 통해 비메오나 도큐시크 (DocuSeek)에서 감상 가능하다. 비메오 버전 (https://vimeo.com/ondemand/suspensionofficial)으로 스트리밍 하면 5불 정도로 가격이 저렴한 편이기도 하고, 대사가 대단히 많지는 않기 때문에 영어가 너무 부담스럽지 않다면 정말 강추한다. 노트북 스피커 이런 걸로 듣지 말고 꼭 이어폰 끼고 감상하자.

 

 

 

PS 내 논문도 이렇게 세련되면 좋겠다... ㅠ 그리고 나도 언젠가 이런 걸 찍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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